1929 광주 학생 항일 운동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 최대규모의 항일 운동으로
3.1운동 10주년을 맞아 항일의 기세를 높이고 1930년 초까지 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한 독립 운동이다.
1.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시작
당시 한국의 학생들은 항일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경제적, 정치적 특혜를 누리는 일본학생들은 조선학생들을 무시했고 교사들도 한국학생들을 차별하기 일쑤였다.
한국 학생들에게 어떠한 도발이 있을 경우 충돌이 일어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일본인 학생들에게 희롱당한 여학생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중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이던 한국인 여학생들을 희롱하기 시작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하고 사촌인 박준채는 항의하였으나 일본인들은 무시하였고
한국학생들과 일본학생들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소동은 일본경찰들이 오고나서야 잠잠해졌고 일본경찰들은 일본인 학생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 결과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시작점이 되었다.
광주고보 학생들은 차별에 대해 집단 항의하였고 일본인 학생들과의 충돌을 편파적으로 보도한
광주일보에 몰려가 항의했다.
이 와중에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조선인 학생이
광주 중학교의 일본인 학생에게 테러를 당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폭력사태가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1차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다.
(장재성)
당시 장재성 광주학생독립운동 지휘부 수장은 구체적으로 일제에 대항할 행동자세를 선포한다.
1. 우리의 투쟁 대상은 일본제국주의 이므로 투쟁의 방향은 일제이다.
2. 광주 중학생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를 일제에 대한 증오와 독립투쟁으로 바꾸자.
3. 광주고보생은 광주고보로 집합해 식민지 강압정책 반대 시위운동을 한다.
4. 시위운동은 장재성이 직접 지위한다.
5. 앞으로도 다른 동지들과 연락하여 다음 투쟁을 계획한다.
장재성의 주도로 광주고보학생들은 광주농고 학생들 그리고 광주시민들과 가두시위를 하였다.
결국 항일시위에 참여한 70여 명의 조선인 학생중 60여 명이 구속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탄압은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일제의 학생운동 탄압과 차별을 비판하는 보도에서 신랄하게 보여지고 만다.
또한 장재성은 풀려난 후에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더욱 퍼지게 하기 위해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한다.
이 유인물의 양은 1,000장이 됐다고 한다.
1929년 11월 12일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광주고보, 광주농고, 광주여자고보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일제에 대항하였고
이 결과로 250여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검거되었다.
이것이 2차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무기정학, 퇴학 처분이 내려졌고 일제는 12월 28일까지 언론통제를 단행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었다
이 사건은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항일의식을 더욱 고취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장재성은 11월 12일 250여명의 학생들과 구속되어 광주지방 법원에서 7년형을 받고
항소심에서 4년형을 선고 받아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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